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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재배 일지/2023년

2023년 1월 17일 화요일 23:48:05

by 스튜디오 잣질 2024. 7. 27.

택배 배송기사 일을 하기 위해 2차 면접을 보러 서울에 다녀왔다. 아주 다행히 빠르면 한 달 안으로 교육을 받고 차를 받아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오늘은 태어나서 가장 많은 서명을 했고 수많이 많은 개인정보 동의를 한 날이기도 하다. 나는 이 모든 결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 오래전에 어린이집 통학 버스를 운행할 때 "기사님" 이란 호칭을 일 년 동안 들었는데 앞으로 5년 이상 다시 "기사님"이 된다.

 

그 와중에 미리 예약해 놨던 비행기 표를 환불도 못 받고 취소해 가며 대안공간 루프에서 전시를 보고 난 후 지하철 안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 손에는 꾸깃꾸깃한 서류봉투가 들려 있었다. 

 

"내 손엔 온갖 대출서류와 취업을 위한 화물 운송 자격증 시험 책, 취업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전시 경력만 빼곡히 적혀있는 이력서까지 모두 들어있는 서류 봉투가 있다. 창밖으로 유유히 흘러가는 소란한 풍경은 이내 잠잠해진다. 꾸깃꾸깃한 서류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시를 보러 왔다. 나는 그렇게 그 작가의 개인전을 오랜 시간 동안 바라봤다. 아니, 작품보다 그 공간을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내가 그토록 꿈꿨던, 바라봤던, 상상했던, 좋아했던 곳이다. 혹, 누가 내 서류 봉투에 있는 택배회사 로고를 알아볼까 봐 얼른 다시 옆구리에 단단하게 구겨 넣은 채 전시를 봤다. 그러면서도 행여 서류 봉투 안에 있는, 내 이름이 적힌 종이가 바닥에 흘릴까 봐 다시 만지작만지작 손이 분주하다. 다행히 알고 지내는 그곳의 큐레이터는 마주치지 않았다. 그래도 작가님께 인사는 드리고 싶어서 붓펜으로 소심하게 내 이름 석자를 몰래 적고 나왔다. 어쩌면 다시 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곳을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종종걸음으로 도망쳐 나왔다."

 

지하철에서 다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휴대전화에 그 생각들을 정리해서 글을 썼고 그 글을 다시 작업 일지에 옮겨 적는다.

 

 

 

오늘은 24시간 식물 재배등으로 키우고 있는 잡초에게 잠을 잘 수 있게 불을 꺼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셔터를 열어놓고 촬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