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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재배 일지/2023년

2023년 2월 18일 토요일 23:58:39

by 스튜디오 잣질 2024. 8. 31.

 

[오픈스페이스 배] 개인전 작품 중 <초충도 8폭 병풍>을 위한 붓글씨 작업을 마무리했다. 서울에 직접 가서 프린트를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에 택배로 프린트를 받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더하여 초반에 프린트했던 사이즈가 작아서 붓글씨를 쓰기 어려운 상황까지 오면서 다시 프린트를 해서 제주에서 받기까지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그냥 흘려버렸다.

 

글씨는 현병찬 선생님께서 써 주셨다.

 

선생님께 글씨를 부탁하기 전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사진에 먹물로 글을 쓰는 순간 매체 고유의 특성이 사라짐과 동시에 아직까지 이런 모험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글 서예의 큰 어르신인 선생님께 글씨를 부탁드리는 게 적지 않는 부담이었다. 그러나 오늘 82세의 할아버지께서 돋보기 안경을 쓰고 사진에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확신이 들었고 감동을 받았다. 선생님의 팔십 평생 시간이 먹을 통해 사진에 옮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잡초 재배 일지 중 핫셀블라드를 팔았던 날의 일기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같이 부탁드렸는데 말없이 작업실 어딘가에 가신 후 고운 화선지 한 장을 들고 오셔서 큰 붓으로 글자를 써 내려가신다. 글자가 모두 끝나고 선생님께서 3개의 낙관을 찍으셨는데 그 내용이 참 재미있다. 내가 돈이 없어서 취업을 했다고 하니 엽전 모양의 낙관을 찍어주시며 앞으로 돈이 많이 들어오기를 바라신다며 함께 행복을 바라는 낙관도 사용하셨다고 한다.  

 

 

비가 많이 온다.

 

받아온 프린트들을 모두 작업실에 널었고 보일러를 틀어서 건조 중이다.

 

선생님께서 믹스 커피를 타 주시면서 물 양을 물으셨다. 진하게 먹는다고 말씀을 드리니 당신의 커피보다 물을 덜 타서 주셨다. 그리고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을 법한 롤 케이크와 군고구마, 그리고 귤을 다정하게 내어주신다.

 

앞으로 오랜 시간동안 기억에 남을 하루였다.

 

이제 "잡초 재배를 위한 트레이"와 "Welcome to the real world" 샹들리에가 남았다.